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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소개

최용신

최용신 사진

농촌계몽활동에 일생을 받친
여성 독립운동가,

최용신은 국권 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농촌계몽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하여 순교자적인 활동을 한 애국지사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겨레의 후손들아, 위대한 사람이 되는데 네 가지 요소가 있나니

첫째는 가난의 훈련이요,

둘째는 어진 어머니의 교육이요,

셋째는 청소년 시절에 받은 큰 감동이요,

넷째는 위인의 전기를 많이 읽고 분발함이라.

최용신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최용신(崔容信, 1909~1935)은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창희(昌熙)로 본관은 경주였다. 두남리는 원산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일찍부터 기독교의 전래와 함께 교회와 학교를 운영하는 등 근대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던 곳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동네교회인 두남리 교회에서 운영하는 주일학교를 다니다가 9살에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신교육을 받기 위해 원산에 있는 루씨여자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졸업 후 전국 5대 명문 학교 중 하나였던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서양 교육과 신문화, 기독교 신앙생활을 보고 배우면서 앞으로 시대 변화를 이끌 신여성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졸업을 앞두고 조선일보에 기고한 「교문에서 농촌에」는 농촌계몽운동의 중요성과 실천을 주장하는 것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경성에 있는 협성여자신학교(現 감리교신학대학교)로 진학하여 황에스더 교수의 지도 아래 농촌계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현장경험을 본격적으로 쌓아갔다. 최용신은 1929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황해도 수안군 용현리에 첫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현지에서 직접 체감하는 가난과 피폐한 농촌생활상은 그녀가 학업에만 몰두할 수 없게 하였다. 결국 1931년 학업을 중단하고 농촌운동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당시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現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 YWCA 농촌지도자의 자격으로 파견되어 농촌교육을 시작하였다. 교회를 빌려 야학을 시작한 최용신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았지만, 점차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모여드는 학생의 수는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더욱 넓은 학습공간이 필요해지자 최용신의 주도하에 마을 사람들과 염석주 등 후원자의 힘이 모아져 마침내 샘골강습소가 문을 열게 되었다.

샘골강습소에는 정식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농촌 어린이들이 모여들었으며, 최용신은 이들에게 한글 강습뿐만 아니라 산술, 재봉, 수예, 가사, 성경 등 농촌생활에 필요한 상식은 물론 애국심과 민족의식도 일깨워주었다. 1934년에는 새로운 학문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일본 고베신학교로 유학하였으나 각기병에 걸려 6개월 만에 다시 안산 샘골로 복귀하였다. 혼자서 가누기 힘든 병든 몸임에도 그녀는 이전보다 더욱 교육에 정진하였으나, YWCA의 후원이 끊어지면서 큰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론(女論)」 잡지에 「농민의 하소연」을 기고하기도 하였으나 그녀의 의지와 달리 사회의 반응은 냉담하였고, 결국 유학 중 얻은 병과 과로로 인해 1935년 1월 23일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샘골강습소를 계속 운영해달라는 유언에 따라 샘골교회 전재풍 목사, 김복희 사모와 최용신의 동생 최용경이 강습소를 도맡아 이끌었고, 1960년에는 김우경 등이 중심이 되어 ‘샘골고등농민학원’으로 다시 문을 열기도 하였다. 1964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는 ‘용신봉사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시상하고 있으며, 1990년부터는 안산에서도 최용신의 애국계몽정신을 기리고자 ‘최용신봉사상’을 제정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더불어 1995년에는 정부에서 국가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2001년에는 문화관광부에서 선정하는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최용신은 국권상실기의 암울한 시기에 진취적인 여성이자 농촌계몽과 민족의식 양성에 힘쓴 애국지사로서 높게 평가받고 있으며, 이에 2007년 안산시에서는 그녀의 애국정신을 기념하고 알리고자 당시 샘골강습소를 복원 건립하여 ‘최용신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상록구 본오동 상록수공원 내에 있는 최용신기념관은 그녀와 관련된 전시를 비롯하여 학술대회, 각종 교육프로그램 및 문화행사를 개최하며 현재도 최용신의 뜻을 이어 나가고 있다.

최용신 추모비(유달영박사가 글을 짓고 민태식이 썼다.)

일제하 처절하던 민족수난기에 나라의 광복 위해 모든 것 버리고 농촌계몽의 선구자로 불사조 되어 이 고장 이 마을에 생명을 바쳤네 영원히 역사에 푸르른 얼이여 꽃다운 처녀 싱그러운 상록수여 민중의 가슴 속에 뿌리깊이 잡 아 지금도 쉬지 않고 사랑으로 자라네

최용신 선생의 묘

  • 지정번호 : 안산시 향토유적 제18호
  • 소 재 지 :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879-4
  • 시 대 : 묘 - 일제강점기(1931∼1935)
  • 규 모 : 봉 분- 240×97cm 유적지-3,723평
최용신 선생의 묘 이미지

묘소 옆에 있는 최용신 선생이 남긴 말씀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샘골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해 주시오.

김군과 약혼한 후 10년 되는 금년 4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

샘골에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하나

어머님을 두고 가니 몹시 죄송하다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마라

유골을 샘골강습소 부근에 묻어 주오.

최용신선생님 남기신 말씀 이미지

최용신(崔容信) 연보

최용신 연보 - 연도와 내용 제공
1909년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부친인 경주최씨 창희의 3녀2남(언니, 시풍, 시항, 용신, 용경) 중 차녀로 출생(8월 12일)
1916년(7세) 두남리에 설립되어 있던 사립 두남학교에 입학, 이 시기 두남교회 주일학교에 다님.
1918년(9세) 부모님의 뜻에 따라 보다 나은 신교육을 받기 위하여 원산에 있는 루씨여자보통학교로 전학
1924년(15세) 루씨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기독교 감리교 계열인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4월)
1925년(16세) 같은 두남리 동네에 살던 교회 학생회 회장인 김학준과 약혼
1928년(19세)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 재학시 교목이었던 전희균 목사의 도움과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권유로 협성여자신학교(현 재 감리교신학대학)로의 진학을 결정함(3월). 이 시기 최용신은 언론에 『교문에서 농촌에』라는 글을 발표함
1929년(20세) 경성(서울)에 있던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 이 여자 신학교는 최용신이 입학한 시기에 학제가 변경되어 3년제에서 4년제로, 남녀 각 학교로 구분되었던 것이 남녀공학이 되면서 1929년 새로 모집한 남학생 15명과 함께 이미 입학한 여자 신학생 5명이 합해서 20명이 교육을 받게 됨(3월) 하기방학을 이용하여 황에스더 교수의 지도로 농촌실습을 학구 김노득과 함께 황해도 수원군 천곡면 용현리에서 실행함. 최용신은 이곳에서 농촌운동의 방행을 터득함(6월)
1930년(21세) 제2차 농촌실습지로 경상북도 포항읍 옥마동에 파견되어 성공적인 농촌활동을 마침(6월).
1931년(23세) 샘골강습소 창설 인가를 받음(5월). 강습소 신축을 위한 추석놀이 개최. 이날 천곡학원 건축발 기회(회장 염석 주)가 조직됨(10월) 둔대리 유지 박용덕씨가 대지 1,530평을 희사하여 천곡교회와 샘골강습소 부지가 마련됨.(10월) 10월 27일 강습소 정초식 거행.
1933년(24세) 강습소 낙성식 거행(1월15일) 샘골강습소에 학생이 몰리자 일제당국은 정원을 110명에서 60명으로 줄이도록 명령함. YWCA는 보조해주던 경비를 이달부터 반액으로 줄임.(10월)
1934년(25세) 이 땅을 농촌운동의 도화선으로 만들려면 새로운 지식과 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일본유학을 결심하고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 청강생으로 입학(3월) 일본에서 동경에 있던 약혼자 김학준 만남. 각기병의 악화로 6개월만에 귀국. 고향인 원산으로 가지 않고 샘골에 돌아와 병든 몸을 이끌고 농촌계몽운동을 열심히 함(9월) 여성잡지 『여론』에 [농촌의 하소연]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샘골학원에 후원을 호소함 (10월).
1935년(26세) 장중첩증으로 수원도립병원에 입원. 두 번에 걸친 수술을 받았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음. (1월) 만 25년 6개월의 일생을 마감함(1월 23일 오전 0시 20분 운명) 최용신이 사망하자 즉일로 장례위원회를 구성(1월 25일) 염석주를 위원장으로 하여 준비부,예식부,운구부,공사부,접대부,안내부,회계, 서기를 부서로 정하고,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것을 정함. 장례식은 오후 2시에 시작되어 진행되었고, 그의 유언에 따라 샘골학원과 교회가 보이는 곳에 유택을 마련함.
1935년 최용신을 모델로 한 심훈의 『상록수』가 동아일보 창간15주년 기념 현상장편소설에 당선됨 (6월)
1939년 류달영의 『최용신 소전』이 성서조선사에서 발간됨(8월)
1960년 샘골고등농민학원 개원.
1964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가 용신봉사상을 제정
1976년 루씨상록회관 준공
1990년 안산시가 최용신봉사상을 재정.
1995년 국가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음(8월 15일)
2001년 『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안산문화원 주관으로 유훈비 건립, 학술세미나, 유적답사 외 다수행사를 거행함.

찾아오시는 길

  • 위치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상록수 우체국 옆 상록수 공원)
  • 소재지 :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879-4
  • 정번호 : 안산시 향토유적 제18호
  • 시대 : 묘 - 일제강점기(1931∼1935) 꽃다운 나이에 꿈을 마음껏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25년 6개월이란 짧은 생을 마감한 최용신.
최용신 선생묘 :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879-4(상록수역에서 쭉 내려간 뒤 천곡교회 부근)

「최용신기념관」건립[2007.9월 개관예정]

  • 본오동 879-4(상록수공원 內)
  • 연면적 462.8㎡(140평)
    (교육실,전시실,泉谷講習所재현 등)
「최용신기념관」건립[2007.9월 개관예정] 사진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 최용신 선생님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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