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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소개

홍명원 선생 묘 및 묘갈

홍명원 선생 묘 및 묘갈

홍명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선조 36년 예조정랑을 거쳐 동부승지 좌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인조반정후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민심수습에 힘썼다.

  • 지정번호 : 안산시 향토문화재 제6호
  • 소재지 :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산78
  • 지정일 : 1991.11.2.
  • 시대 : 조선 중기

홍명원(洪命元, 1573~162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낙부(樂夫), 호는 해봉(海峯), 본관은 남양, 진사 영필(永弼)의 아들이다. 선조 30년(159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를 거쳐, 세자시강원설서에 이르렀고 사서·수찬·헌납이 되었으나 권신들을 탄핵하던 끝에 미움을 사서 함경도도사로 좌천되었다.

선조 36년(1603) 예조정랑으로 훈련도감낭청을 겸했고, 이후 죽주(안성)부사로 죽주산성(竹州山城)을 쌓고 돌아와 수찬·시강원필선·장령 등을 역임했으며 도체찰사 이항복(李恒福)의 종사관으로 평안도와 황해도를 거쳐 동부승지·좌승지를 역임했다. 광주목사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가선대부(종2품)로 승계되었다.

광해군 7년(1615)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고향인 해곡(海谷 : 성곡동)으로 돌아갔다. 광해군 14년 후금과 수교한 사실이 명나라에 알려져 양국 관계가 미묘해지자 급고사(急告使)로 명나라에 가서 이를 무마했고, 후금의 위협에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관직에 있을 때는 공평무사했으며 중국에 갔을 때는 그곳 학자들이 장덕군자(長德君子)라 칭하였다고 한다. 시와 문장에도 뛰어나 특히 한대(漢代)의 문장과 당대(唐代)의 시에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해봉집(海峯集)」을 남겼다.

묘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파평윤씨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지었으며 글씨는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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