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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소개

강징 선생 묘 및 신도비

강징 선생 묘 및 신도비

강징은 조선 전기의 문신, 서예가로 성종 25년 급제하였다. 중종 때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예조참판까지 이르렀다.

  • 지정번호 : 안산시 향토문화재 제3호
  • 소재지 : 안산시 상록구 양상동 산16-3
  • 지정일 : 1991.11.2.
  • 시대 : 조선 전기

강징(姜澂, 1466~1536)은 조선 전기의 문신·서예가, 자는 언심(彦深), 호는 소재(少齋)·심재(心齋), 본관은 진주(晉州), 증이조판서 이행(利行)의 아들이다. 성종 25년(1494) 권지부정자로 과거에 급제, 부제학을 거쳐 연산군 10년(1504) 왕에게 사냥을 삼갈 것을 말했다가 낙안(樂安)에 유배되었 연산군 12년(1506) 복세암(福世庵)을 옮겨 짓는 것을 반대하여 투옥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석방되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중종 3년(1508)과 중종 16년(1521)에 각각 성절사(聖節使)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전주와 경주부윤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경연관으로 8년간 재직하였는데 강학을 할 때 말이 유창하여 여러 경청하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또한 강징은 필법이 당대 으뜸이어서 명에 갔을 때 황제가 그의 뛰어난 붓글씨 솜씨에 감탄하여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으며, 중종의 명으로 명신들의 시문을 쓰게 하여 홍문관에 걸어두고 여러 신하들의 처신의 거울로 삼게 하였다. 조선 전기 문신 정난종(鄭蘭宗)의 신도비의 글씨는 강징이 쓴 것이다.

묘 아래에는 신도비가 있으며 비문은 정사룡(鄭士龍)이 짓고 조상우(趙相愚)가 글씨를 썼으며 윤덕준(尹德駿)이 전액(篆額)* 하였다.

* 전액(篆額) : 전서(篆書)체로 쓴 비석, 현판 등을 설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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