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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소개

김여물 장군 묘

김여물 장군 묘

김여물은 조선시대의 충신으로 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충주 전투에서 적 수십명을 죽이고 물에 투신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지정번호 : 안산시 향토문화재 제4호
  • 소재지 : 안산시 단원구 와동 141번지
  • 지정일 : 1991.11.2.
  • 시대 : 조선 중기

김여물(金汝岉, 1548~1592)은 조선 중기의 충신으로 자는 사수(士秀), 호는 피구자(披裘子), 외암(畏菴), 시호는 장의(壯毅), 본관은 순천, 성현도찰방 훈(壎)의 아들이며 영의정 류(瑬)부친이다. 김여물은 어렸을 때부터 병서에 밝았으며 20세(1567)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30세에 대과에 합격하였다.

선조 24년(1591) 의주목사로 있을 때 서인(西人) 정철(鄭澈)의 당으로 몰려 파직 투옥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申砬)의 종사관으로 충주 전투에 참전하였다. 전투에서 패하자 신립과 함께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적 수십 명을 죽인 뒤 물에 뛰어들어 순절하였다. 이듬해 의관을 거두어 안산 동장리(洞長里)에 장사지내고 정려(旌閭)*를 세웠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신도비에는 ‘무릇 충신·열사가 나라를 섬김은 국난을 당했을 때 목숨을 바쳐 인(仁)을 이루는 데 있다. 하늘의 명 또한 위훈과 환업으로써 그 자손을 반드시 창성하게 하니, 이것은 마치 상하가 서로 주고받으면서 보답하는 것과 같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애국충정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김좌명(金佐明)이 글씨를 썼으며 이정(李正)이 전액(篆額)** 하였다.

* 정려(旌閭) : 효자, 충신, 열녀 등을 그 동네에 붉은 문을 세워 표창하던 일

** 전액(篆額) : 전서(篆書)체로 쓴 비석, 현판 등을 설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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